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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학계에 NO라고 말했던 한국인 의사, 세계 심장수술 교과서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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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you 2011. 4. 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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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학계에 NO라고 말했던 한국인 의사, 세계 심장수술 교과서를 바꾸다

[중앙일보] 입력 2011.04.08 02:04 / 수정 2011.04.08 09:58

[J 스페셜 - 금요 헬스실버] 박승정 서울아산병원 심장병원장
‘왼쪽 주요 관상동맥 스텐트 시술’ 세계 첫 성공·보급

심장의 동맥이 좁아지거나(협심증) 막히는(심근경색) 심장병은 생명과 직결된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개그맨 김형곤씨도 심장병 때문에 쓰러졌다. 두 가지 치료법이 있다. 갈비뼈를 잘라내고 가슴을 열어 우회 혈관을 만드는 수술법, 허벅지 혈관을 통해 풍선이나 볼펜 스프링 같은 그물망(스텐트)을 넣어 막힌 혈관을 뚫거나 넓히는 시술(심장혈관 중재술)이 있다. 효과·안전성이 비슷하다면 어느 길을 택할지는 자명하다. 4일(한국시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미국심장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서울아산병원 박승정(57·심장병원장) 교수는 “시술이 수술 못지않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서울아산병원 박승정 교수가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있다. 그의 발표는 미국·일본·프랑스·스웨덴 등 4개국에 생중계됐다. [서울아산병원 제공]
학회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심장전문의 3만여 명이 참석했고 박 교수 세션에는 3000여 명이 참석했다. 약 20년 전 미국에서 심장병 치료를 배우고 간 한국인 의사가 선진국 의사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심장병 교과서에는 심장에 영양과 산소를 공급하는 좌우 관상동맥(왕관처럼 생긴 혈관) 중 왼쪽 주요 혈관(left main)이 막힐 경우 수술하도록 돼 있다. 지난 30년간 유지돼온 이 원칙을 박 교수가 바꾼 것이다. 발표장에서는 박수가 쏟아졌고 여느 학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문 제기도 일절 없었다. AFP는 이날 학회 관련 기사에서 박 교수의 논문을 비중 있게 소개했다.

 박 교수의 발표는 세계 최고의 의학학술지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JM)에 실렸다. 과학잡지 하면 ‘네이처’나 ‘사이언스’를 떠올리지만 의사들은 NEJM을 최고로 친다. 여기에 한 번 실리기도 힘든데 박 교수는 네 번이나 실렸다. 국내에 박 교수 외에는 딱 한 번 게재한 의사가 한 명 있을 뿐이다.

 박 교수의 ‘성역 도전’은 험난했다. 1997년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의 동료 의사들도 “생사람 잡는다”고 말렸다고 한다.

 -처음에 외국 의료진 반응이 어땠나.

 “4~5년 전엔 미국의 의사, 특히 흉부외과 의사들은 노골적으로 ‘미쳤다(crazy)’며 조롱했다. 학회에서 발표할 기회도 제대로 안 줬다.”

 - 그런데도 밀어붙인 건 다소 무모하지 않았나.

 “환자를 위한 최선의 치료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 팀은 흔들리지 않았다.”

 -스텐트 시술이 수술보다 낫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유럽연합(EU)은 이미 우리 시술법을 공식 인정했다. 미국도 과거엔 ‘(스텐트 시술이) 절대 안 된다’였는데 ‘할 수 있다’로 지침을 바꿨다.”

 요즘은 그간 박 교수를 힐난했던 미국 의사들도 ‘박승정 시술법’을 한다. 2009년 이후 미국·일본 등지의 외국인 의사 100여 명이 박 교수에게서 시술법을 배워갔다.

 박 교수는 중재 시술에 거의 미치다시피 했다. 1980년대 후반 세브란스병원 전임의 시절에는 방사선 노출량이 많아 백혈구가 떨어져 한 달 동안 ‘시술실 출입금지’ 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스텐트 시술을 할 때 동영상 X선을 가동하기 때문에 하루 노출 시간이 제한돼 있다).

 박 교수는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외국 학회에 나가서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한밤중에도 팀원들에게 비상을 건다. 시차 적응할 겨를도 없다. 본인이 의문을 던지고 앞서 해결하려 한다. 진료·연구에서 후배 의사들이 잘못하면 불호령을 내린다. 그러면서도 사석에서 따뜻하게 감싼다.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할 때는 팀원의 자녀가 장애 때문에 힘들어할 때 월급을 쪼개기도 했다. 20여 명의 팀원은 그를 ‘왕박’이라고 부른다. 왕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서울아산병원 이종영(38·심장내과) 교수는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품으면 교수님은 ‘우리가 왜 못 해’라고 한다”며 “교수님의 열정 앞에서 때로는 내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아산병원을 찾은 환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살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20여 명의 팀원이 10분 안에 달려올 수 있게 병원 주변에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10년째 유지하고 있다. 일종의 5분 대기조다. 응급환자 때문에 호출을 받고 한밤중에 몇 차례나 병원으로 나간 적도 있다.

 박 교수는 4일 학회 발표 직후 “(우리에게 의학을 가르쳐준) 미국의 의학 학술대회에 참가해 ‘노(No)’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분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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